박찬갑,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60년 동안 놓지 않은 한 예술가의 기록
강원도 정선에서 진행되는 박찬갑 작가의 ‘상상속으로의 여행’ 오프닝에 참석하기 위해 서울에서 200km를 내달렸다. 8월 8일. 강릉에서 시작된 장맛비가 정선으로 넘어오며 거세게 퍼붓던 날이었다.
갑작스러운 폭우가 온 세상을 집어삼킬 듯 쏟아졌지만 노작가의 작품과 이야기를 듣는 일은 기쁨이었다.
병방치 스카이워크를 배경으로 산자락에 기대어 자리 잡은 정선의 507미술관에 도착하니 오프닝에는 작가와 참여 작가의 이야기가 꽃을 피우고 있었다
그 비를 뚫고 찾아간 사람은 올해 여든여덟의 박찬갑 작가였다. 여든을 훌쩍 넘긴 나이에도 그는 여전히 작품 앞에 서 있고, 여전히 만들고, 여전히 묻는다.
그의 이야기는 샘솟는 샘물 같다. 작품 앞에 서면 이야기가 끝이 없다. 사람들 앞에서는 자신의 소신을 펼쳐내고, 작품 앞에서는 작품마다 품고 있는 이야기를 풀어낸다. 사연도 많고 꺼리도 많다. 이야기를 듣다 보면 오히려 88세라는 숫자가 걱정스러울 정도다. 노익장의 자세 앞에서 배움이 그득하다.
이곳에서는 8월 2일부터 31일까지 국제현대미술관 소장품전 ‘상상 속으로의 여행(A Journey into Imagination)’이 열리고 있다. 33개국 59명의 작가가 참여한 전시다.

박찬갑의 작업을 따라가다 보면 ‘무엇을 만들었는가’보다 ‘무엇을 덜어냈는가’라는 질문에 닿게 된다.
그의 작가노트에는 이런 문장이 적혀 있다. “나의 작업은 자연의 섭리를 바탕으로 삼는다.”
그에게 자연은 단순히 작품의 소재가 아니다. 자연의 질서 속에서 인간이 지나치게 움켜쥔 욕망과 욕구를 내려놓고,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는 길을 찾는다. 무엇인가를 더 채워 인간을 완성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둘러싼 수많은 욕망과 문명의 껍질을 걷어내면서 비로소 인간의 본질에 가까워진다는 생각이다.
그래서 박찬갑의 조각에는 묘하게 단순한 사람들이 등장한다. 복잡한 표정도, 화려한 몸짓도 없다. 하늘을 향해 서 있거나 서로 나란히 서 있는 인간들. 때로는 입을 크게 벌린 형상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그 입은 단순한 신체의 일부가 아니다.
인간은 태어나자마자 울음으로 세상에 자신의 존재를 알리고, 살아가면서 말과 소통으로 서로를 이해한다. 박찬갑에게 입은 인간 존재의 시작이자 소통의 통로다. 말하기 이전의 울음과 말 이후의 이해 사이에 인간의 삶이 놓여 있는 셈이다.
그의 인간 군상은 그래서 군중이라기보다 ‘존재’에 가깝다. 무엇인가를 소유하기 위해 달려가는 사람도 아니고, 서로를 밀어내며 경쟁하는 사람도 아니다. 그저 서 있고, 바라보고, 존재한다.
그 침묵 속에서 오히려 질문이 커진다.
나는 누구인가. 어디에서 왔으며 어디로 가는가.
박찬갑은 이 질문에 특별한 해답을 내놓으려 하지 않는다. 오히려 자연 앞에서 마음을 열고, 욕망을 내려놓고, 인간의 본래 모습을 바라보는 과정을 통해 스스로 답을 찾아가도록 한다.

그의 작가노트에 적힌 또 하나의 문장은 오래 마음에 남는다.
“나는 사랑의 씨앗이며 사랑으로 왔다가 사랑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60년을 조각해온 작가가 끝내 도달한 곳이 ‘사랑’이라는 사실이 뜻밖이면서도 자연스럽다. 무언가를 만들어 세상에 남기는 일이 예술의 전부라면, 그의 조각은 이미 충분히 설명됐을 것이다.
그러나 박찬갑에게 작업은 살아 있다는 것, 일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사랑을 남기고 떠날 수 있다는 것에 대한 끊임없는 확인에 가깝다.
그래서 그의 조각은 돌이나 금속으로 만든 인간의 형상이면서 동시에 한 인간이 평생 자신에게 던진 질문의 형상인지도 모른다.
1987년에 시작된 “나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은 그렇게 60년의 작업을 관통해왔다. 그리고 여든여덟의 작가는 여전히 그 질문 앞에 서 있다.
박찬갑 작가의 작품에는 이 질문이 오래 머물러 있다. 그는 입을 형상화한 작품을 두고, 인간은 태어날 때 울음으로 세상과 처음 소통하며 살아가면서도 결국 말과 소통을 통해 서로를 이해한다고 이야기했다.
박찬갑 작가의 활동 무대는 정선에만 머물지 않는다. 동강변의 영월 국제현대미술관을 중심으로 국내외 작가들과 교류해왔고, 조각심포지엄 등을 통해 세계의 작품들을 우리 곁으로 불러왔다.
1987년에 시작된 “나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은 여든여덟의 작가에게도 끝나지 않았다. 어쩌면 이날 쏟아진 폭우도 그 질문을 만나러 가는 길의 한 장면이었는지 모른다.

그리고 507미술관에 들어서면서 또 하나의 이야기를 만나게 됐다. 한때 사람들의 생활을 위해 쓰였던 폐위생처리장이 미술관으로 다시 태어난 곳이다.
녹이 슬어 검푸른 빛을 띤 천장과 커다란 창고의 흔적은 그대로였다. 한때 버려졌던 공간에 예술이 들어서고, 오래 작업해온 한 작가가 그곳에서 다시 사람들을 만나고 있었다.
너답뉴스 김해숙 기자 youdabnews@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