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5일, 풍기에 위치한 금계 계곡을 다시 찾았다. 금선정과 게양정에 앉아 황재천 선비(금계의 종손)의 금계 황준량 선생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며 조선으로 돌아가 보았다. 초가을 이였다.
툭 하고 무언가 떨어지는 소리에 눈과 귀를 세웠다. 밤인가?
꾸치뽕 이다. 아니다. 산딸이라는 나무라고 한다. 매우 붉은 빚깔이다. 얘는 어째 이리 색상이 예쁜지 길가에 서서 감탄하고 있다. 소나무가 멋지게 도열한 금계 계곡을 뒤로 하고 마을을 뒤 산 쪽으로 올랐다, 가까운 거리이긴 하나 잠깐의 가파름에 숨을 고르고 나니 연꽃이 듬실듬실 올려져 있는 네모난 정원?이 있고 마치 있지 않을 곳에 있는 것처럼 신비한 한옥이 정갈하고 우뚝한 모습으로 있다. 금양정사다. 선뜻 오르지 않고 주변을 휘휘 돌며 탐색을 한다. 금양정사의 안으로 불쑥 들어가는 것이 송구하게 느껴지는 듯 선뜻 발을 들이지 못하고 탐색하는 자세가 되어 괜스레 여기저기를 돌아보았다.

풍기 금양정사
석두몽천출(石竇蒙泉出)[돌구멍에서 몽천이 솟아 나오고]
잔안금수개(孱顔錦樹開)[산에는 비단 빛 나무 펼쳐졌네]
추풍고산흥(秋風故山興)[가을바람에 고향 산천 흥겨워]
일취강선대(一醉絳仙臺)[강선대에서 흠뻑 취하였네]
금계 황준량이 금양정사를 읊은 싯구를 보며 그가 매우 사랑하는 장소라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정사하면 사찰을 먼저 떠올리지만 조선의 정사는 선비들이 독점한 사립학교다. 금양정사는 사립학교로서 1563년에 창건 되었고 현재는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388호다. 영주시 관내에서 향교, 사찰, 소수서원을 제외하고는 가장 역사가 오래된 한옥이다.
주세붕이 소수서원을 창건한 이후 서원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선비들은 공교육에 만족하지 못하고 퇴계 이황 등 당시 명망 있는 선비들을 중심으로 서원 등 사학 창설 운동을 벌였다. 금계 황준량은 사학 창설 운동의 선봉자다. 그는 부임지 마다 학교를 창건하고 증축하였다.
영천의 백학서원, 성주의 공곡서당, 영봉서원(현 천곡서원) 건설 마무리 및 확충, 칠곡의 녹봉정사와 풍기의 금양정사 창건이 그의 업적이다. 금계 황준량이 정한 녹봉정사 운영 지침은 인근 지역 학교로 전파되어 시행되었고 금양정사는 금계 황준량이 마지막으로 창건한 학교다.
언덕 길을 잠시 힘겹게 올라오면 말굽 모양의 산자락에 쌓여 고고하게 자리 잡은 조선의 한옥을 올려다 보았다. 그곳의 경관에 취한 금계의 모습이 보이는 듯했다. 조선의 사람 금계의 마음을 생각하며 필자 또한 금계의 마음이 되어 보았다.
아쉽게도 금계는 금양정사를 건립하고 학문의 꿈을 꾸었지만 고향에 돌아 오던 중 객사했다. 그의 나이 47세였다.
금계 황준량, 500년 전의 인물 금계가 회자되는 연유는 무엇일까?
금계 황준량은 금양정사가 완공되기 전에 세상을 떠났지만 금양정사의 아름다움을 시로 남겼다.
황준량의 자는 중거, 혹은 금계이며 본관은 평해다. 중종 35년 과거에 급제 후 성균관 박사, 호조좌랑 겸 춘추관 서기관, 신녕현감·단양군수, 성주목사를 지냈고 중종과 인종의 실록편찬 참가했다. 모친 봉양을 이유로 목민관으로 나선 후 중앙의 요직이 제수되어도 나아가지 않았고 목민관을 일관했다.
금계의 이른 죽음에 대한 추정은 성호 이익과 퇴계 이황의 글에서 볼 수 있다. 학문에 대한 열정이 넘치는 금계는 밤샘 토론을 즐겨 잠과 건강을 상했기 때문이라고 퇴계는 적고 있다.
이익의 성호사설에 의하면 금계는 매우 눈에 띄는 미남자로 잘생겼다고 한다. 성주목사로 부임하던 날, 거리에서 어떤 여성의 구애를 공개적으로 받았다. 거절 당한 그녀는 자살을 택했고 귀신이 되어 밤마다 찾아 왔다고 한다. 힘들었을 듯 싶다.
토론과 학문을 좋아해 밤을 새는 일이 허다하고, 낮에는 목민관으로서 최선을 다하는 생활을 하는 그의 청빈한 삶은 건강을 해하기 좋은 조건이다.
퇴계 이황이 남긴 금계 일대기(行狀)에 의하면 단양군에 군수로 부임하자마자 군민의 어려운 삶의 원인이 나라에 있음을 알았다. 현장 조사를 통한 실상을 통계적 수치로 입증한 후 임금에게 상소, 모든 조세와 부역 면제를 받아 단양군민을 죽음에서 건졌다.
다산 정약용의 기록에도 금계는 신령현과 성주목에서 어려운 백성들이 나라에 진 부채 장부를 불태우는 과단을 보였다. 당시 부채장부는 창고에 실물이 있어야 없앨 수 있었으나 지역의 선비들과 유력자들을 설득하여 창고를 채워 넣었기에 가능했다.
사람에 대한 칭찬이 인색했던 퇴계 이황이 47세에 타계한 금계 황준량을 애통해 했다. 행장(사람의 일대기 요약)을 직접 짓고, 제문을 두 번이나 쓰고, 만시를 두 번이나 쓰고, 문집의 편차를 직접 정했다. 금계를 매우 아꼈던 퇴계는 17년이나 차이 나는 나이에도 불구하고 절친으로 여겼다고 한다.
퇴계 이황은 사람에 대한 기록은 오로지 명종, 퇴계의 선친, 조광조, 이현보, 이언적, 권벌, 금계 황준량 만을 소개하는 글을 남겼다고 한다.
금계 황준량이 지방화 시대의 모델 목민관이란 평을 받는 연유는 온전히 백성의 입장에서 바라보고 실천하는 행위를 했기 때문이다. 금양정사가 오늘날까지 사랑을 받으며 지켜지는 이유는 퇴계 이황이 민관합동기구인 유향소에 보존을 당부한 점, 그 유지를 받는 관과 민, 후손들의 애씀이다.
필자가 글을 남긴다면 누구를 꼽을 것 인가를 고민해 보았다.

창건주의 뜻은 후세에 이어져 선비들의 강학 장소가 되다.
금양정사는 창건된 후 많은 선비들이 와서 강학을 하였다. 일제 강점기엔 선비 이동정이 상주하여 강학을 열었다.
측량 기술을 갖고 있으면서도 일제에 도움을 주길 거절한 성암 김세영이 그에게서 깊은 학문적 성취를 이루었다.
조선의 마지막 급제자 금주 황헌도 선조인 금계선생이 세운 금양정사에서 강학을 하였다.
광복 후에는 금양정사에서 공부하고 사법고시에 합격한 사람도 있다.
현재 금양정사는 금계종손 황재천씨를 비롯 후손과 욱양서원의 후신인 욱양단 유사에 의해 수호되고 있으며 많은 사람이 방문하고 있다.
“가는 곳마다 학교를 세우고 군민을 위해 부채 장부를 태웠던 울 할배…비단금, 신선선.. 선비의 목표는 신선이며 주민주도형으로 지키고 가꾸는 마음을 지켜내고 싶다” “이미 여러 사람이 금양정사에서 강학을 하고 있다. 공부를 하는 모임이라면 누구든 환영한다”며 금계 마을을 지키는 황재천 금계 종손은 말했다.
금계가 사랑 받는 연유 중 또 하나는 종손 황재천씨로 인함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어머님의 병구완을 하기 위해 잘나가던 서울의 직장을 뒤로 했고, 어머님이 타계한 후에는 금계 마을을 알리며 선비 정신을 강연하는 지역민이 되어 금계를 빛내고 있다.
필자도 우연히 그를 만나 금계마을을 방문했고 금계를 알게 되어 황재천 선비의 활동을 보게 되었다. 오백년 소나무와 금선정, 계양정, 금강정사를 지키며 사람들에게 해설사로 선비로 지역민으로 살아가고 있는 있는 현대 선비다.
어린 소녀의 뒷모습을 찍으며 할아버지의 마음으로 어른의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 보는 이 시대의 선비!
아주 오랜 할배에 대한 깊은 애정으로 마을을 돌아보는 황재천 선비의 선한 행동이 아름답다.
너답뉴스 김해숙 기자 youdabnews@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