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정순왕후(1745~1805)는 두세 사람이 있다.
제6대 단종의 왕비로 1440년(세종 22년) ~1521년(중종 16년 )사망한 여산 송씨로 성품이 공손하고 검소하며 효우(孝友)가 있어 종묘를 영구히 보존할 수 있는 인물이라 하여 1453년(단종 1) 간택되어 이듬해 왕비에 책봉되었다.1455년(세조 1) 세조가 즉위함에 따라 의덕왕대비(懿德王大妃)에 봉하여졌으나, 이듬해 성삼문(成三問)·박팽년(朴彭年)·하위지(河緯地) 등 사육신의 단종복위운동으로 1457년(세조 3) 단종이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봉되어 영월에 유배되자 부인으로 강등되었다.1698년(숙종 24) 노산군이 단종으로 추복(追復)되자 다시 정순왕후로 추복, 신위가 창경궁에 옮겨졌다. 능호는 사릉(思陵)으로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읍 사릉리에 있다.
두 번째는 정순왕후는 조선후기 제21대 영조의 왕비로 정성왕후 사후 15세의 나이로의 계비가 된 노론 벽파계 집안 출신으로, 국혼 후 오빠 김귀주를 중심으로 큰 세력을 형성했다. 정조가 즉위하자 왕대비가 되었고 순조가 11세로 즉위하자 대왕대비로서 수렴청정을 했다. 수렴청정 중에 노론 벽파 심환지를 영의정에 임명한 후 정조의 측근들을 내치고 신유사옥으로 남인 청류들을 대거 숙청함으로써 정조 재위기의 개혁 정치를 원점으로 되돌렸다는 평가를 받는다. 창덕궁 경복전(景福殿)에서 61세로 승하하였다. 슬하에 자녀는 없다.
단종이 죽은 후 단종비 정순왕후는 동대문 밖으로 쫒겨나 초암인 정업원에 살았다. 아침 저녁으로 산에 올라 통곡했다. 하여 동정곡, 동망봉이라는 이름을 지어 단종비의 비각에 前峯後巖於千萬年(앞봉우리, 뒤의 바위, 천만년을 가리). 라고 새겨 영조가 정순왕후를 애도했다. 영조의 단종을 향한 애달픔은 청령포의 비각에도 나타나 있다. 하여 자신의 어린 왕비를 정순왕후라 이름 지었나?
2019년 종로구에서 있었던 일이다. ‘60여 년을 홀로 지내며 세상을 떠날 때까지 단종을 그리워하며 서러운 삶을 살았던 절개와 충절의 상징’으로 정순왕후를 간택한 종로구는 만 15∼20세 여성 지원자를 대상으로 64년 수절을 기리는 선발을 했으나 시대 착오 논란에 쌓여 간택을 취소한 적이 있다.
영월군에서 단종제에 참가할 정순왕후를 전국을 대상으로 모집 중이다.
“조선 최초의 여성전용공간을 만들고, 조직적 여성 연대를 이끌어냈던 시대를 초월한 자주적 여성상 정순왕후” 라고 명명한 영월문화재단의 홍보를 보면서…
정순왕후의 정신을 발전·계승할 이 시대의 정순왕후 모집하고 있는 영월군의 의도는 수절의 애달픈 여인을 원하는 것은 아닌 듯 보이는데, 영월군에서 선발하는 정순왕후가 궁금해진다.
너답뉴스 김해숙 기자 youdabnews@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