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의 우수, 터진목 4.3유적지
제주 4.3 성산읍 지역 양민 집단학살터 묘거석
‘이곳은 1948년 제주4·3사건 당시 성산읍내 성산리 인근 고성리, 오조리, 신산리 삼달리 등지에서 끌려온 무고한 학살터인 곳이다. 당시 이곳에서 억울하게 희생된 양민들 약 400여 명이나 되나 이름조차 알 수 없는 희생자는 유족이 없어 이 모래밭에 묻히거나, 거센 바닷물에 떠내려가 버려진 시신도 여럿이었다.
그처럼 뼈아픈 역사의 현장은, 그간 아무런 흔적도 없이 방치된 채 유수와 양해자들의 발길과 거친 파도에 유실됨은 물론 심지어 관광 성수기 휴양시설 조성 등에 도로 확장이라는 미명 아래 역사의 현장 일부가 도로로 편입되어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이에 우리 유족들은 그 아픈 역사의 현장을 보존하고 보호하며 다시는 그런 비극의 역사가 재연되지 않도록 하는 교육의 장이 되게 함은 물론 오가는 이들로 하여금 분향 헌화의 자리라도 마련하고자 건너편 서쪽 언덕에 건립된 추모비와 함께 여기가 비극의 현장임을 알리는 조그만 표석을 마련한다. 2013년 11월 5일 성산읍 4·3사건 희생자 유족회 회원일동‘

성산에서 광치기 해변을 따라 섭지코지를 갈 예정이였다. 광치기해변에 닿기 전에 해원의 커다란 원 앞에 있는 글들을 차근히 들여다 보고 있었다. 제주 4. 성산읍 지역 양민 집단학살터 묘거석이였다.
4.3을 알기 전에는 제주가 마냔 아름답기만 했다. 그러나 4.3을 알고 난 후에는, 동광 넓궤에 포복해 들어갔다 나온 이후로 나는 말을 잃었다. 동백 꽃마냥 아름다움 아래 감추어진 붉은 핏빛에 가슴을 저며야 했다. 무거운 침묵의 걸음이 되었다.
근처에 계시던 분이 가까이 다가와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성산에서 광치기해변에 닿기전 터진목은 원래 섬이였다고 전한다.
섬의 우수 , 강중훈
여기 가을 햇살이 / 예순 두해 전 일들을 기억하는 그 햇살이
그때 핏덩이 던 할아비의 주름진 앞이마와 / 죽은 자의 등에 업혀 목숨 건진 / 수수깡 같은 노파의 잔등위로 무진장 쏟아지내 / 거북이 등짝 같은 눈을 가진 무리들이 바라보네
성산포 ‘앞바르 터진목’
바다 물살 파랗게 질려 / 아직도 파들파들 파들파들 떨고 있는데 / 숨비기 나무 줄기 끝에
철지난 꽃잎 몇 조각 / 핏빛 태양 속으로 목숨 걸듯 숨어드는데 / 섬의 우수 들불처럼 번지는데
성산초 4.3희생자 위령제단 위로 / 뉘 집 혼백인 양 바다갈매기 하얗게 사라지네
르 클레지오 …2008년도 노벨문학상 수상자(프랑스)
섬에는 우수가 있다. 이게 어디서 나오는지 알 수 없다. 그것이 마음 갑갑하게 만드는 이유다. 오늘날 제주에는 달콤함과 떫음, 슬픔과 기쁨이 뒤섞여있다. 초록과 검정, 섬의 우수, 우리는 동쪽 끝 즉 새벽바위라 불리는 이곳에서 느낄 수 있다. 바위는 떠오르는 태양과 마주한 검은 절벽이다. 한국 전역에서 순례자들이 첫 해돋이의 마술적인 광경의 축제에 참석하러 오는 곳이 바로 여기다.
1948년 9월 25일(음력) 아침에 군인들이 성산포 사람들을 총살하기 위하여 트럭에서 해변으로 내리게 했을 때 그들의 눈앞에 보였던게 이 바위다. 나는 그들이 이 순간에 느꼈을 새벽의 노르스름한 빛이 하늘을 비추는 동안에 해안선에 우뚝 서 있는 바위의 친숙한 모습으로 향한 그들의 눈길을 상상할 수 있다. 냉전의 가장 삭막한 한 대목이 펼쳐진 곳이 여기 일출봉 앞이기 때문이다. 이 모든 것은 1948년 4월 3일에 제주에서 군대와 경찰이 양민학살(인구의 10분의1)을 자행한 진부한 사건으로 시작되었다.
오늘날 이 잔인한 전쟁의 기억은 지워지고 있다. 아이들은 바다에서 헤엄치고, 지신들 부모의 피를 마신 모래에서 논다. 매일 아침 휴가를 맞은 여행객들은 가족들과 함께 바위너머로 솟는 일출을 보러 이 바위를 오른다. 숙청 때 아버지 할아버지 할머니 삼촌들을 잃은 시인 강중훈씨조차 시간의 흐름에 굴복했다. 그가 아무것도 잊어버리지 않았다면 -그의 시 한편 한편이 그 9월25일의 끔찍한 흔적을 지니고 있다. – 그걸 뛰어넘을 필요성도 알고 있다.
(유럽 최대 잡지 『GEO』 2009년 3월호에 게재된 ‘제주 기행문 중에서… J.M.G. Le Clézio le prix Nobel de littérature 2008 수록)
남은 이들은 추모공원을 세웠다.
과거를 잊고 산다는 것은 미래를 포기하는 것과 같다며 2024년 11월 5일 성산읍4.3희생자 유족회는 잊지않기 위해 추모비를 조성했다. 한사람 한사람의 성금으로 말이다.

나는 오랫동안 서서 이 글들을 눈에 아로새겼다. 또 지역민과의 대화를 기억했다
그는 1945년생으로 6·25 전쟁 당시에 어린 시절을 보냈다. 1·4 후퇴 무렵 경기도 평택에서 인민군과 함께 지냈던 기억과 이후 월남전에 참전했던 경험을 가지고 있다. 4·3 사건의 성격과 원인은 남한 단독 정부 수립에 반대하던 제주도 상황에 김달삼을 비롯한 공산 세력(빨치산)이 개입하면서 사건이 시작되었다고 본다.
나는 해방 직후 미군정의 개입과 국가적 기반, 행정력, 정규군이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극도의 혼란기에 해방에 도망갔던 기득권자들을 다시 불러 직책을 맡겼던 실책을 이야기했다. 해방 직후 미군정의 상황과 4·3 진상조사 과정에서 확인된 국가의 진압 책임 등을 설명하며 그의 인식과 다른 자료들을 이야기했다.
그는 무고한 수많은 양민이 비극적으로 휩쓸려 억울하게 희생된 사실은 안타깝게 생각하지만 당시의 국가 안보적 위기와 혼란스러운 시대적 정황상 어쩔 수 없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던 측면이 존재했다고 본다. 사건의 책임을 단순히 이승만 대통령이나 특정 인물 개인의 잘못으로만 돌려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노무현 정부 시절 평화재단 설립 등을 통해 진상규명과 유족들의 한을 푸는 상생·화합의 계기가 마련되었다고 평가했다.
외지에서 온 지역민인 그와의 대화에서 제주 4·3 사건이라는 한국 현대사의 깊은 아픔을 바라보는 두 가지 상반된 프레임이 부딪히는 전형적인 모습을 보았다.
그는 참전 경험과 방공·안보 중심의 교육을 받고 자란 세대의 시각(국가적 혼란과 공산화 방지의 불가피성)을 대변하고, 나는 민주화 이후 밝혀진 진상조사 결과와 인권·피해자 중심의 시각(국가폭력과 무고한 양민 학살의 비극)을 대변했다. 서로 살아온 시대와 접한 정보가 다르기에, 동일한 사건을 두고도 출발점 자체가 다름을 보여주는 씁쓸한 대화였다.
개인의 비극과 시대적 불가피성 사이는 참으로 먼 거리다. 역사를 거시적인 정치와 이념의 결과로 바라볼 때, 그 안에서 짓밟힌 한 사람의 삶은 얼마나 쉽게 지워지는가.
오랫동안 말조차 꺼내기 어려웠던 4·3의 역사는 이제 서로 다른 기억이 부딪히는 자리까지 왔다. 그날의 대화에서 우리는 끝내 같은 곳에 도달하지 못했다. 다만 그는 돌아서며 다시 공부해보겠다고 말했다.
어쩌면 해원은 같은 생각에 이르는 일이 아니라, 서로 다른 기억을 가진 사람들이 한 자리에서 끝내 대화를 멈추지 않는 것인지도 모른다.

일출이 멋지다는 광치기 해변의 중간 즈음에 나는 자리를 틀었다. 밀려왔다 부서지고 돌아가고 또 다시 밀려오는 파도를 한없이 바라보며 마냥 앉아 있었다. 그저 마냥 바라만 보게 되는 이상한 경험을 오래도록 했다.
성산에서 섭지코지까지는 한 시간 30분이면 걸을 수 있다는 길을 나는 3시간 30분 만에 걸었다. 피로했지만 이상하게도 머리는 맑았다. 명료했지만 몹시 힘든 길이었다.
왜 그렇게 오래 걸렸는지는 나도 모르겠다. 터진목에서 한참을 서 있었고, 광치기해변에서는 밀려왔다 부서지고 다시 돌아가는 파도를 오래 바라보았다. 마냥 파도를 바라보며 앉아 있었다.
아름다운 길이었다. 그러나 그 아름다움만 바라보고 지나갈 수는 없었다. 그날 나는 섬의 우수를 따라, 아주 많이 느린 걸음으로 섭지코지까지 갔다.
너답뉴스 김해숙 기자 youdabnews@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