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여행] 창덕궁, 한겨울…비어 있을 때 비로소 드러나는 궁궐

한파가 정점이였던 지난 1월 어느날, 창덕궁을 찾았다. 체감 온도는 매서웠지만 햇살은 조용히 공간을 데우고 있었다. 시리도록 차가운 공기 속에서 낙선재 마루에 앉아 오래 머물며, 조선의 역사와 인간의 삶을 떠올렸다. 햇살이 매우 따사롭게 느껴졌다. 꽃과 잎이 사라진 서늘한 궁궐은 오히려 더 많은 것을 드러냈다.
창덕궁은 55만㎡ 규모 중 3분의 2가 후원으로 이루어진 궁궐이다. 해설을 따라 약 세 시간 머무는 동안, 이곳이 단순한 관광지가 아니라 ‘머무는 공간’이라는 사실이 분명해졌다. 아름다움을 뽐내었던 수목이 벌거벗은 모습이 되려 민낯의 모습으로 겨울의 창덕궁을 지켜주고 있었다.
창덕궁은 1405년, 조선 태종 5년에 창건된 이궁이었다. 그러나 임진왜란 이후 가장 먼저 재건되면서 약 270년 동안 사실상 법궁의 역할을 했다.
정전인 인정전은 국가 의례가 이루어지던 공간이다. 그러나 경복궁 근정전에 비해 낮고 절제된 구조를 갖는다. 창덕궁의 특징은 위엄보다 균형에 있다.
조선의 왕들의 평균나이가 46세, 대조전은 왕비의 적자 생산을 중요시했지만 조선의 27명 왕 중 적자는 7명이다.
선정전은 왕의 일상 업무 공간이었고, 궁궐 유일의 청기와 건물이다. 희정당과 대조전은 조선 후기와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서양식 요소가 내부에 들어왔다. 샹들리에, 유리창, 카펫이 전통 공간 안에 공존한다. 궁궐이 시대의 충돌을 그대로 품고 있는 셈이다.
대조전 동쪽 흥복헌에서는 1910년 경술국치가 결정되었다. 1926년 4월 25일 대조전의 동쪽에 위치한 흥복헌에서 순종이 52세의 나이로 승하했다. 장례식 날인 1926년 6월 10일에 30여만의 인파가 몰렸고, 종로 3가에서 중앙고보생이 만세를 외치면서 대규모 학생 중심의 만세 운동인 6.10만세 운동이 일어났다. 국왕의 장례 기간은 최대 5개월 안에 이루어졌다.

창덕궁은 단순한 왕의 공간이 아니라 근대사의 균열이 남아 있는 장소이면서 조선의 궁궐 중에서 원형이 가장 잘 보존된 곳으로 인위적 축을 강조한 궁궐이 아니다. 지형을 따라 건물을 배치하고, 자연의 흐름에 순응했다. 이러한 특징으로 1997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됐다.
후원은 정치와 분리된 또 하나의 궁궐이다. 부용지와 주합루는 학문과 사색의 공간이었다. 정조가 이곳에 자주 머물렀던 이유는 분명하다. 권력의 중심에서 벗어나야 비로소 생각이 정리되기 때문이다.
애련지, 연경당, 옥류천으로 이어지는 동선은 일부러 돌아간다. 효율이 아니라 머무름을 위한 구조다. 궁궐은 빠르게 통과하는 공간이 아니라, 속도를 늦추는 장치다.
낙선재, 마지막 황실의 시간
4500평 규모의 낙선재는 헌종의 서재 겸 사랑채로 사용하던 건물로 1847년(헌종 13)에 지었다. 낙선재 바로 옆은 헌종의 후궁 경빈의 처소인 석복헌이 있으며 석복헌 옆에는 당시 대왕대비인 순원왕후의 처소인 수강재가 있다.
단청을 하지 않은 소박한 모습, 장락원 대문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후원에는 세련된 굴뚝과 괴석들을 배열하여 궁궐의 품격과 여인의 공간 특유의 아기자기함을 볼 수 있다. 낙선재 일원은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후 순정 황후와 이방자 여사가 1989년까지 살았고 덕혜옹주 등 대한제국 마지막 황실가족이 생활 하다가 세상을 떠난 곳이기도 하다.
덕헤옹주는 1930년에 조현병 진단을 받았고 1962년에 서울에 돌아와 1989년 4월 21일 서울 창덕궁 낙선재에서 77세의 나이로 서거했다. 고종의 사랑을 듬뿍 받았던 어린 그녀는 낯선 이국의 삶을 견디지 못했고 온전하지 않은모습으로 돌아왔다. 궁궐은 권력의 상징이었지만, 동시에 개인의 삶과 고통이 쌓인 장소이기도 했다.

장락문에는 ‘무궁한 즐거움’이라는 뜻이 담겨 있다. 장락문은 흥선대원군의 친필이다. 궁궐의 곳곳에 기원의 이름이 있지만 현실은 반대였던 아이러니를 느껴야했다. 실제 역사는 그 반대였다. 궁궐 곳곳의 이름과 현실 사이에는 늘 간극이 존재한다. 희망사항과 현실의 괴리를 이름에서 보았다.
겨울의 후원은 조용하다. 바람 소리와 발자국 소리만 남은 궁궐은 가장 솔직한 모습이 된다. 관광객이 줄어든 궁궐은 왕이 머물던 자리, 사색하던 자리, 혼자가 되던 공간이 다시 살아난다.
창덕궁은 화려할 때보다 비어 있을 때 더 많은 이야기를 건넨다. 궁궐은 채워질수록 침묵하고, 비워질수록 말하기 시작했다. 찬바람 에이는 궁궐에 서성이며 지나간 옛사람들의 삶을 엿보았다.
비원은 흔히 봄과 가을 사진 명소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 공간의 본래 모습은 ‘사유의 공간’에 가깝다. 겨울이 되면 나뭇잎이 모두 떨어진다. 시선은 꽃이나 색이 아니라 지형과 구조로 향한다. 그제야 길의 방향과 건물의 배치가 또렷하게 보인다.
정조가 자주 찾았던 비원도 화려한 계절보다 이런 시간이 더 많았다. 바람 소리, 발자국 소리, 얼음이 녹았다 다시 어는 소리가 공간을 채운다. 부용지에 서면 왜 이곳에 머물렀는지 자연스럽게 이해된다. 연경당 마루에 앉으면 궁궐이 아니라 사람이 살던 집처럼 느껴진다.
이곳의 길은 일부러 돌아간다. 빠르게 이동하기 위한 길이 아니라, 천천히 걷게 만드는 길이다. 궁궐은 원래 그런 공간이다. 지나가는 곳이 아니라, 머무르게 하는 곳이다.
창덕궁 후원은 궁궐 북쪽에 자리한 정원이다. 비원, 금원, 북원 등 여러 이름으로 불렸는데, 모두 같은 공간을 가리킨다. ‘비밀스러운 정원’이라는 뜻을 가진 비원은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널리 알려진 대중적인 이름이 되었다
부용지는 창덕궁 후원의 첫 번째 중심 정원으로 사각형 연못이다. 이 연못을 중심으로 정자와 건물들이 둘러서 있다. 남쪽의 부용정은 십자 형태의 지붕을 가진 독특한 구조다.
북쪽의 주합루는 2층 건물로, 아래층은 규장각, 위층은 정조가 머물던 공간이다. 주합루로 들어가는 문인 어수문은 왕과 신하의 관계를 상징한다. 왕은 정문으로, 신하는 옆문으로 들어갔다.
주합루(宙合樓)는 부용지 북쪽에 1776년(정조 즉위)에 지은 건물이다. 주합루는 2층 규모로 지어졌는데 1층은 왕실도서관인 규장각이고, 2층은 주합루이다. 주합루의 정문인 어수문(魚水門)은 물과 물고기, 즉 왕과 신하의 관계를 뜻하며 지은 이름이다. 주합루로 들어가기 위해 왕은 어수문으로 출입하지만, 신하들은 어수문 옆 협문으로 출입하였다.

두 번째 정원인 애련지는 연꽃을 좋아했던 숙종이 이름을 붙인 연못이다. 지금은 섬이 사라졌지만, 연못과 정자의 구조는 그대로 남아 있다.
연경당은 궁궐이면서도 사대부 집처럼 지어진 공간이다. 사랑채와 안채가 나뉘어 있지만 내부는 이어져 있다. 이곳에 앉으면 ‘궁궐’보다 ‘사람 사는 집’이라는 느낌이 먼저 온다.
연못을 중심으로 겹지붕의 육각형 정자인 존덕정, 부채꼴 형태의 관람정, 서쪽 언덕 위에 있는 길쭉한 맞배지붕의 폄우사, 관람정 맞은편의 승재정 등 다양한 형태의 정자들이 있다. 이곳에 있는 정자 중 존덕정이 가장 오래된 건물이다.
옥류천은 후원 가장 안쪽에 있다. 좁은 골짜기를 따라 물이 흐르고, 바위에는 ‘옥류천’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작은 정자들이 흩어져 있어 걷다 보면 하나씩 모습을 드러낸다. 이곳에 이르면 궁궐이라는 감각은 거의 사라진다
소요정, 태극정, 농산정, 취한정, 청의정 등 작은 규모의 정자를 곳곳에 세워져 있어 자연 속에 들어온 느낌이 더 강해진다. 천천히 걸으며 사색하게 만드는 공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