빗줄기가 맥없이 흩날리는 면천읍성에 도착하니 야트막하고 아담한 성이 맞아 주었다. 작은 동네에 세련된 성이라는 느낌은 성곽과 초록과 하늘이 먼 과거의 어딘가로 데려온 듯한 느낌을 갖게 했다. 촐록 잔디밭에 깔끔한 돌성벽은 기대고 싶게 했다. 성안에는 콩국수 집들이 즐비하고 사람들이 줄이어 서 있었다. 꽤나 알려진듯 관광차들이 사람들을 풀어내고 있었다.
드라마에서만 보던 성안의 예전 모습을 짐작할 수 있는 모습이 감동으로 다가왔다. 오래전 성안과 성밖을 살았던 사람들의 삶을 모습을 , 들판을 그려볼 수 있었다. 레트로 감성을 불러 일으킬 만했다.
콩국수 집들이 많은 걸 보니 면과 관계 되었나? 노비들의 고장이였나. 노비가 면천을 당해서 면천인가? 돌비석에 서있는 저 면자는 뭐지? 농담이지만 궁금해졌다.
먼저 성곽을 따라 길게 한바퀴 돌아 동네를 거닐어 대숲으로 들어섰다. 두견주를 비롯, 막걸리 만드는 양조장이 있었다. 스레트집, 허물어져 가는 오래된 집이 있는 현대와 과거가 공존하는 동네였다. 다시 돌아나와 남문을 통해 들어와 성안을 구석구석 훝었다. 저잣거리와 방앗간, 다방, 콩국수집, 협동조합과 관아, 삼일운동기념, 미술관, 카페 등이 있다. 나즈막하면서 한눈에 들어오는 면천의 모습이 보기 좋았다.
물이 많이 흘러 내리는 고장이여서 면천의 이름을 갖게 된 면천, 면천읍성을 한 눈에 느낄 수 있으려면 성곽안 거리, 향교, 대나무 바람 숲, 향교, 박지원이 만들었다는 건곤일초정, 성외곽을 따라걸어보는 것이 면천읍성을 충분히 즐길 수 있는 곳이다. 여유로운 곳이다.

물이 가득 흘러서 바다로 모여 들어간다(면피류수 조종우해)는 시경의 한구절에서 이름을 따왔다는 면천은 아산만에 면해 있는 접경지다. 예당평야의 중심지에 있어 당진ㆍ신창ㆍ덕산ㆍ예산 등을 연결하는 교통망은 물론 군사상의 요충지였다.
‘沔川’이라는 지명은 조선 태종 13년(1413년)에 공식 군명으로 등장하며, 이 지정 이전부터 고려사와 여러 지리지에도 ‘면주(沔州)’나 ‘면천’의 전신 지명이 기록되어 있다.『세종실록』 지리지와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여지도서』, 『면천현읍지』 등에서 고증자료가 풍부하게 남아 있다.
그래서인지는 모르겠는데 면천군은 1100년 역사를 지녔다는 진달래로 빚은 면천주, 두견주, 꽈리고추가 유명하다.
1994년에 세워진 면천부지의 돌에 새겨진 글씨들이 세월만큼 흐려져 가고 있었다. 읽기가 쉽지 않았으나 이러한 내용이였다.
‘백제 때는 혜군, 신라 경덕왕 때는 혜성군, 고려 현종왕 때 운주에 속한 후 감무(지방관)를 두었다. 충렬왕 16년에 현인 복규가 원나라 태종의 2자(둘째 아들) 합단의 병을 막아 공을 세워 왕에게까지 알게 되어 면주라 부르게 되었다. 이조 태종 13년부터는 면천군으로 고쳤다. 서기 1914년 군면 폐합으로 당진군에 편입되었다. 갑술년 1994년 5월 수립’

500년 전에도 공사실명제가 있었다, 각자성돌
성벽의 커다란 돌들 곳곳에 흐릿하게 사라져가는 글들이 있다. 이는 읍성의 축조시기를 파악할 수 있는 각자성돌이다. 연도, 구간책임군현, 축성구간들이 새겨진다. 세종실록에 따르면 50여 군의 장정들이 와서 면천성을 쌓았다는 기록이 있다. 다른 동네와 협업하고 동원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이곳 면천읍성의 확인되는 각자성돌은 총3개라 하는데 필자는 확인하기 어려웠다.
면천의 뜻은 높은 산에서 내(물)가 흘러 가득하다는 뜻이며 순수한 한글 지명은 ‘밋내’이다. 각자성돌이라는 이름도 참 예쁘다는 느낌이다.
남문을 들어서기 전에 동그랗게 옹벽이 되어있는 것은 적을 현명하게 물리치기 위한 방책임을 알고는 무릎을 쳤다. 이 성은 1439년에 왜구의 침입에 대비한 조선의 읍성인데 아이러니하게도 관군과 일본군이 의병을 물리치는 성이 되기도 했었다.
을사늑약에 항거하여 관직을 사퇴한 최구현(1866~1906)은 의병장이 되어 1906년 4월에 의병을 일으켜 면천성을 공격했고 5월 10일 일본군 수비대 및 관군들과 싸웠다. 이후 36명의 의병과 재기를 도모했지만 8월 28일 일본군에 붙잡혀 희생되었다. 이 작은 마을에서 싸웠을 그들의 모습이 그려진다.

건곤일초정은 조선의 정조때(1800년) 면천군수로 온 연암 박지원이 세웠다. 골정지 한가운데 섬을 만들고 육각형의 초장을 세워 건곤일초정이라 지었다. 두보의 시에서 따온 말로 은자들의 정취가 베어있는 곳이다.
연암은 1797년에서 1800(당시 64세)년까지 4년 간 면천군수로 지내면서 면양잡록, 과농소초, 한민명전의를 집필했다. 아직 개화전의 연잎들이 빗방을 머금고 아름다움을 가득 풍기는 정자에 오래도록 머물렀다. 연암은 이곳에서 사람들과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을테고, 집필을 고민했을 것이다.
그런데 문득 드는 생각이 조선의 선비들은 공부가 쉬웠지 싶다. 그저 중국에 있는 문헌이나 사람들의 말을 인용해오면 되었으니 말이다. 소위, 있어 보이는 학문? 이 아닐까 하는 우매한 생각을 했다.
대숲 바람길의 과거로 가는 노란문 앞에서 감시 고민을 했다. 조선으로 갈까? 고려로 갈까 고민하다가 신라를 택해 보았다. 면천에서 추억 한조각, 여기 좋다. 그리고 너도…같은 문구들이 조금 뜬금 없었지만 열의로 받아 들였다. 비를 맞으며 쑥쑥 자라나는 죽순을 보면서 남도의 정취를 한껏 음미했다.
당진 성산리산성
충청남도 기념물 당진성상리산성이 면천읍에 있기에 같은 곳인가 했다. 약 1km걸어 면천관내에서는 가장 고식의 산성이며 마한 또는 백제시대의 치소(治所)였을 가능성이 있다고 문화유산청은 소개하고 있는데 아쉽게도 현지에서 확인하기 어려웠다.
‘당진성상리산성은 충청남도 당진군 면천면 성상리 83번지 외 6필지이다. 당진에서 아미로를 거쳐 면천에 이르는 길과 삼거리가 만나는 나즈막한 나무고개가 있는데, 나무고개 바로 옆에 몽산 자락이 쭉 뻗어 내려오다 두툼하게 뭉친 표고 119m의 야산을 주민들이 ‘테뫼산’이라고 부른다. 태뫼산 산기슭에 있는 성터가 바로 당진성상리산성이다.’
향토문화전자대전을 인용했다. 산성과 읍성은 분리가 된다.
작은 규모의 읍이지만, 많은 스토리들이 현존하고 즐길 수 있는 한나절이였다. 짠지네 식당에서 짜글이 찌개를 먹고 다시 서울로 향했다.
“작은 읍성에 기대어, 오래된 바람의 이야기를 들었다. 면천, 그 조용한 전장.”
너답뉴스 김해숙 기자 youdabnews@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