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와 전자계약, 디지털 무역이 빠르게 확산하면서 국경을 넘는 상거래 분쟁을 해결하기 위한 법과 제도도 변화해야 한다는 논의가 APEC에서 나왔다.
APEC 경제위원회는 8월 27일 중국 다롄에서 국경 간 상업분쟁과 디지털 경제에서 국제법률 수단의 활용을 주제로 한 워크숍을 열고, 디지털 경제의 변화에 맞춰 국제적 분쟁 해결 절차를 보다 신속하고 예측 가능하게 만들어야 한다고 밝혔다.
이번 논의의 핵심은 디지털 거래가 확대되면서 기존의 법적 기준만으로는 분쟁의 관할권과 적용 법률, 판결의 집행 문제를 해결하기 어려워지고 있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한 국가의 기업이 다른 국가에 상품을 수출한 뒤 대금 지급을 거부하거나 상품의 위조·훼손 여부를 놓고 분쟁이 발생할 경우 어느 나라 법원이 사건을 맡아야 하는지, 어떤 법률을 적용해야 하는지, 내려진 판결이 상대국에서 인정되고 집행될 수 있는지를 다시 따져야 한다.
특히 전자상거래와 AI 기반 사업이 확대되면서 문제는 더욱 복잡해지고 있다. 계약은 전자적으로 체결되고 증거자료는 클라우드에 저장될 수 있으며, 거래 당사자들이 서로 다른 국가에 있는 경우도 일반적이다. 분쟁이 발생해도 물리적인 장소를 하나로 특정하기 어려운 사례가 늘어나는 것이다.
APEC 경제위원회 의장인 제임스 딩 박사는 디지털 혁신이 사업 방식뿐 아니라 국제사법과 구조개혁에도 새로운 질문을 던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국제적 법률 수단이 변화에 맞춰 조정돼야 기업들이 국경을 넘어 보다 확신을 가지고 거래하고, 분쟁을 신속하게 해결하며, 투자자들이 자산의 보유와 보호 방식에 대해 명확성을 가질 수 있다고 강조했다.
국제적인 법률 절차가 복잡하다는 점은 특히 중소기업에 큰 부담이 될 수 있다. 대기업과 달리 자체 법무 인력을 충분히 확보하기 어려운 중소기업은 여러 국가의 법률과 절차를 동시에 검토해야 하기 때문이다.
결국 법적 불확실성은 단순한 법률 문제를 넘어 새로운 시장에 진출하려는 중소기업의 거래 결정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 국경 간 거래에서 분쟁이 발생했을 때 해결하는 비용과 시간이 지나치게 커지면 기업이 아예 거래 자체를 포기할 가능성도 있다는 것이다.
APEC은 이러한 문제에 대응하기 위해 온라인 분쟁 해결(ODR) 분야에서도 협력을 추진하고 있다. 자율적으로 운영되는 ‘온라인 분쟁 해결 협력 프레임워크’를 통해 중소기업이 기존 법원 절차에만 의존하지 않고 참여 온라인 플랫폼을 이용해 국경 간 상업분쟁을 해결할 수 있도록 하는 방식이다.
국경 간 법률 절차의 디지털화도 논의됐다. 전자적인 법률문서 송달과 원격 법정 심리 등을 확대하면 다른 국가에 있는 당사자에게 서류를 전달하고 증거를 확보하는 데 걸리는 시간과 비용을 줄일 수 있다는 취지다.
국제적인 증거 수집과 법률문서 송달 과정에서도 변화가 요구된다. 현재는 수출 관련 서류나 서면 증거를 다른 국가에서 인정받기 위해 법원과 정부기관, 대사관 등의 확인 절차를 거쳐야 하는 경우가 있어 상당한 시간이 소요될 수 있다.
헤이그 국제사법회의(HCCH)의 송달협약과 증거협약은 이러한 국경 간 절차를 일정한 방식으로 처리할 수 있도록 공통 절차를 제공하고 있다. 기존의 복잡한 외교적·행정적 절차를 줄여 국제분쟁의 지연을 완화하기 위한 장치다.
이번 워크숍에서는 디지털 경제가 확대될수록 법적 절차 역시 국경을 넘어 연결돼야 한다는 점이 강조됐다.
APEC 경제위원회 측은 국경 간 거래가 더욱 복잡하고 디지털화될수록 명확하고 예측 가능한 법적 규칙이 중요해진다고 밝혔다. 무역과 투자 정책만으로는 디지털 경제의 안정적인 성장을 뒷받침하기 어렵고, 분쟁을 해결할 수 있는 법적 인프라 역시 경제구조개혁의 중요한 요소라는 의미다.
이번 워크숍은 홍콩이 제안하고 인도네시아, 한국, 싱가포르가 공동 후원했다. 홍콩 국제법률인재양성원과 헤이그 국제사법회의 아시아·태평양 지역사무소가 공동으로 주관했다.
디지털 무역이 국경의 의미를 바꾸고 있는 가운데 앞으로의 경쟁력은 얼마나 빠르게 거래하는가뿐 아니라 분쟁이 발생했을 때 얼마나 빠르고 예측 가능하게 해결할 수 있는가에도 달려 있다. 관세와 물류비가 눈에 보이는 무역장벽이라면, 서로 다른 법체계와 복잡한 국제절차는 디지털 시대의 새로운 보이지 않는 장벽이 될 수 있다.

너답뉴스 김해숙 기자 youdabnews@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