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 고양의 인물, 문정공 석탄 이신의 선생(1551~1627)… 평범하나 비범한 인물
행주산성 역사공원에 조우한 석탄 이신의 선생은 조선 중기의 문신이다. 호는 석탄, 본관은 전의. 형조참의를 지낸 원손과 정부인 이씨의 삼형제 중 둘재로 한성에서 태어나 고양에서 성장하고 생활했다.
그는 벼슬 앞에서는 물러날 줄 알았고, 전쟁 앞에서는 나아갈 줄 알았으며, 권력 앞에서 침묵하지 않았던 조선의 선비였다. 특별한 정치인도 이름난 사람도 아니지만 흔들리지 않았기 때문에 특별해진 사람이다. 그의 삶을 따라가다 보면 조선이라는 시대를 지탱했던 또 하나의 축을 발견하게 된다.
일부 자료에서는 그를 조선 후기 인물로 소개하지만 생몰연대(1551~1627)를 보면 명확히 조선 중기 인물이다.
이신의는 한성에서 태어나 고양에서 성장했다. 어린 시절 부모를 잃고 형에게 학문을 배웠으며, 일찍부터 성리학에 깊이 몰두했다. 1582년, 학행으로 천거되어 첫 관직에 나아갔지만 곧 벼슬을 내려놓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는 권력보다 학문을 선택했고, 출세보다 자신의 수양을 중요시 여겼다. 고양에 머물며 『대학차록』을 저술하고 왕도정치와 치세에 대한 자신의 사유를 다듬었다.
그가 42세가 되던 1592년 임진왜란에 향군 300명을 이끌고 직접 전장에 나섰다.
선비가 붓을 내려놓고 칼을 든 순간이다.
1596년 이몽학(李夢鶴)의 난 때에는 직산현감으로 천안군수 정호인(鄭好仁)과 함께 8,000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병사(兵使)에게 가 합세하였다. 1604년 괴산군수를 거쳐 광주목사(廣州牧使)·남원부사·홍주목사·해주목사 등을 역임하였다.
1617년(광해군 9) 이항복·정홍익·김덕함 등이 영창대군을 죽이고 인목대비를 유폐하는 등 광해군의 폭정에 대해 극간하다가 유배되자, 이신의도 상소를 올려 권력을 비판하여 유배, 위리안치되었다. 그의 선택은 충성이 아니라 기준이였던 것으로 보인다
6년의 유배기간 그는 거문고를 구하여 ‘사우가’와 ‘단가육장’을 지었다. 이는 오늘날 학술연구와 더불어 수능문제로 출제되는 등 문학적 가치성을 인정받고 있다. 고산 윤선도의 오우가가 이의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1623년(인조 1) 인조반정으로 풀려 나와 형조참의·광주목사를 역임하고, 지방 행정과 국가 운영에 참여한다. 1627년, 정묘호란 속에서 수원에서 왕을 호종하던 중 병을 얻어 생을 마감한다.
행촌 민순의 문인으로 들어가 사계 김장생 등과 친교를 맺었고, 묵재 이귀후 선생과 교분이 두터웠다. 그는 사후 이조판서에 추증되고 고양 문봉서원과 괴산 화암서원에 제향되었다. 문집으로 ‘석탄집’이 있다.
오늘날 남효온, 김정국, 기준, 장지운, 민순, 홍이상, 이유겸과 함께 고양의 8현으로 불리고 있는 인물이다.

그가 남긴 업적은 300여 명의 제자를 길러내고 성리학의 맥을 지역에서 이어간 사상가이며 전쟁과 정치 속에서도 기준을 지킨 실천가라 지칭될 것이다.
이신의라는 고양의 인물을 연구하며 그가 가졌던 삶의 기준을 살펴보았다.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하는지, 기준을 제시해주었다. 필요할 때는 물러나고 필요할 때는 나아가며 끝까지 기준을 바꾸지 않았던 이신의의 삶은 현재도 진행중이다.
너답뉴스 김해숙 기자 youdabnews@naver.com